서울도보관광코스 중에 전통마켓지역 2개 코스를 마치니, 테마코스지역에는 3개 코스가 있다. 이중에 18번째 창경궁과 19번째 창덕궁코스는 전통문화중심지역에서 있었던 3번째 창경궁과 4번째 창덕궁코스와 중복된다. 전통문화중심지역에서 두 곳은 궁전 위주였는데, 테마코스 지역에서는 나무 위주의 생태코스로 차이가 있다. 앞서 궁전 위주의 코스 관람 때에 녹음이 우거진 숲까지 두루 보았기에 생략하고 20코스로 간다. 18코스 창경궁은 다음 주 야간관람이 예약되어, 다시 갈 예정이다.

           < 서울도보관광 전체코스 지도(사진을 클릭하면 확대 선명함) >

                         < 20번째 성균관 코스 경로지도>

             < 성균관(문묘)의 배치도(사진을 클릭하면 확대 선명함) >

  성균관(成均館)은 고려 말과 조선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의 명칭으로, 학궁(學宮) 또는 반궁(泮宮)이라고도 하였다. 성균((成均)은 음악의 조율을 맞춘다는 말로서 어그러짐을 바로 잡아 이루고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문묘(文廟)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유교의 중요한 사당이라고 할 수 있다. 성균관과 문묘는 1938(태조7)에 처음 세워졌으나, 화재와 전쟁으로 여러 차례 고쳐지었고,

                      < 9:55, 4호선 혜화역 4번 출입구 >

               < 9:55, 4번 출구로 나와 창경궁 방향 직진 골목 >

             < 9:58, 큰 도로 성균관대학교 입구 사거리 >

  1869(고종6)에 크게 수리되어 현재에 이른다. 지금의 위치에 성균관대학교만 있는 줄 알았지, 제사를 지내는 문묘와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이 있는 줄은 최근에 알았다. 모 방송국의 인기 TV드라마성균관 스캔들로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지었다. 서울도보 관광코스 덕분에 성균관에 처음 가서 유생들의 삶과 이들이 생활하던 공간, 그에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어 기쁘다. 4호선 혜화역 4번 출입구로 나와 창경궁 가는 골목 안으로 직진하면 성대입구 사거리이다.

               < 10:01, 좌측 방향의 정문(뒤에 탕평비각과 신삼문) >

              < 10:02, 탕평비각(蕩平碑閣)- 는 배치도상의 번호 >

                    < 10:02, 비각 옆, 하마비(下馬碑) >

  횡단보도를 건너 직진하면 성균관대학교 정문이다경로는 정문탕평비().하마비.반수실문(동삼문)대성전영역비천당은행나무명륜당영역존경각. 육일각. 향관청정록청 순서이며, 소요시간은 2시간이고, 만남장소는 성균관대학교 정문이다. 넓은 정문 왼쪽의 대학교 표시석 뒤로 탕평비각과 하마비가 있다. 당쟁의 폐단을 막기 위해 영조 18(1742) 성균관 유생들에게 내린 글을 비로 만들어, 1칸 규모의 비각 안에 두었다. 일명 어서비각(御書碑閣)이라고도 칭한다.

           < 10:03, 정문에서 캠퍼스로 오르는 차도(우측상단 신삼문) >

                < 10:04, 신삼문(神三門, 삼문, 통행불가) >

               < 10:06, 우측 방향의 정문에서 성균관으로 진입 >

  비각 옆의 하마비에 새겨진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높고 낮은 모든 사람은 이곳에서부터 말에서 내려라뜻이다. 여름이면 성균관 유생들이 수영을 즐겼던 하천반수는 복개가 되어서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문묘의 정문을 찾기 위해 캠퍼스 차도 따라 오르니, 우측의 신삼문(神三門, 삼문)은 굳게 닫혀 있다. 성현(聖賢)들의 넋이 출입하는 세 개의 문이라고 하여 신삼문이 되었다. 태조 7(1398) 대성전과 동시에 지어진 문으로 대성전 남쪽 남향으로 3칸의 규모이다.

            < 10:07, 대성전 동묘 건물과 유림회관 건물 사이 진입 >

              < 10:08, 간이 관리사무실 우측 하연대(下輦臺) >

             < 10:09, 하연대 왼쪽 동삼문(東三門, 실문, 어삼문) >

  다시 정문으로 내려와 우측의 성균관 표시석 뒤쪽 우측으로 진입한다. 왼쪽의 대성전 동묘 건물과 오른쪽의 유림회관 건물사이 도로로 진입한다. 막다른 길에 관리사무실처럼 보이는 조립식 건물이 있다. 건물 우측에 임금이 성균관을 방문할 때 타고 온 가마를 내려놓던 하연대(下輦臺)가 자리하고 있다. 왼편 건너편에는 동삼문(東三門)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문은 임금만 드나들 수 있는 문으로 평상시에는 닫혀 있다. 이 곳 두 곳은 자세히 보고가야지, 잘 보이지 않아 지나치기 쉽다.

                     < 10:10, 동삼문 위쪽 옆문으로 입장 >

         < 10:11, 대성전 영역, 묘정비각(廟庭碑閣), 우측은 신삼문 >

                      < 10:12, 대성전(大成殿) >

  동삼문 위의 출입문을 이용하여 대성전 영역으로 들어간다. 코너에 있는 묘정비각은 문묘의 연혁을 기록한 비각으로 태종 10(1410)에 변계량에게 작성해 비를 세웠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4(1626)에 복원되었다. 보물 제141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성전은 공자(孔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이다. 공자를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자(子思子). 맹자(孟子)4(四聖)을 좌우에 배향(配享)하고, 공자의 제자 10(十哲) 등의 위패를 모신 문묘이다.

                        < 10:16, 대성전(大成殿) 앞에서 >

                       < 10:18, 명필 한석봉 글씨의 현판 >

            < 10:19, 대성전 앞에서 바라본 왼편의 동무(東廡) >

  우리나라 신라의 설총(薛聰),최치원, 이이, 이황을 비롯하여 모두 18(十八賢)을 종향(從享)하였다. 고려와 중국에서는 위패 이외에 조각상을 두었으나, 조선시대는 위패만을 모셨다. 대성전 현판은 조선 중기의 명필 한석봉(韓石峰)의 글씨이다. 대성전의 동쪽과 서쪽에 있는 동.서무(.西廡)는 태조 7(1398) 대성전과 동시에 창건하여 공문(孔門)제자 69분의 위패를 포함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 112분의 위패를 동.서로 봉안하였다가 해방 후 전국유림대회 결정으로 이동 조정한다.

             < 10:20, 대성전 앞에서 바라본 오른편의 서무(西廡) >

                 < 10:22, 대성전 영역 내 제기고(祭器庫) >

                 < 10:23, 대성전 영역 내 재학당(載學堂) >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는 대성전에 모시고, 그 밖의 94현의 위패는 매안(埋安, 위패를 땅에 묻음)하여 지금은 비어 있다고 한다. 서무 뒤편 대성전 영역 안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되었던 건물들이 있다. 왼편으로 제사에 필요한 도구를 보관하던 제기고가 있다. 중간에 있는 재학당은 문묘를 관리하던 담당자가 거처하던 곳으로 대성전 서쪽 담장 밖에 남향 4칸으로 건조되었다. 수복청(守僕廳)이라고도 불린다. 오른쪽에는 석천 때 희생(犧牲)을 준비하던 전사청(典祀廳)이 자리하고 있다.

                 < 10:25, 대성전 영역 내 전사청(典祀廳) >

               < 10:31, 현재 담 밖에 있는 비천당(丕闡堂) >

                  < 10:33, 비천당에서 명륜당으로 가는 문 >

  성종 3(1472) 대사성 이극기(李克基)의 요청에 의해 대성전 서쪽에 동향 6칸 규모로 건립되었다. 제사기구와 제물준비, 제사진행 인원의 거처가 있는 제례(祭禮)공간을 벗어나 현재 돌담 밖에 있는 비천당으로 간다.큰 계책을 크게 밝혀 사악함을 억누르고 정의를 일으킨다라는 주자의 말에서 취한 건물이라고 한다. 현종 5(1664) 민정중의 건의로 건립되어, 1과장인 명륜당과 함께 제2과장으로 활용되었다. 비천당은 국왕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과거를 거행할 때 머무르던 곳이다.

                      < 10:35, 명륜당(明倫堂) >

                       < 10:37, 명륜당 앞에서 >

                    < 10:39, 서울 문묘 은행나무 >

  비천당은 정문에서 캠퍼스로 올라가는 차도 옆에 위치하여 성균관으로 나오고 들어 갈 때는 좁은 문을 통과한다. 문으로 들어오면 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는 영역이 성균관의 교육공간이다. 1938(태조7)에 설립되어 왕세자까지 교육한 조선시대의 최고 학부였으며, 때때로 과거 시험장소로도 사용되었다.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는 공자가 강학했던 곳에 은행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후대에 유학을 가르치는 곳에는 은행나무를 심어 학문의 장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10:40, 명륜당 현판과 내부 >

               < 10:41, 명륜당 앞에서 바라본 오른편의 서재(西齋) >

               < 10:42, 명륜당 앞에서 바라본 왼편의 동재(東) >

  북경과 동경의 대학들도 여전히 은행나무들이 많고, 서울의 옛 서울대학교 인근 대학로에도 은행나무들이 많다. 명륜당은 학문을 익히고 공부하던 강당으로, 3동을 하나로 연결해 지었다. 가운데 건물은 마루로 되어 있고, 그 양쪽 날개채에 선생들이 거처할 수 있는 온돌방을 두었다.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는 20칸의 긴 건물에 앞뒤로 툇마루를 설치한 독특한 형식이다. 성균관 대학교가 생긴 이후에도 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기숙하며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 10:43, 동재 방 한 칸의 창문 >

                  < 10:43, 창문 안으로 들여다 본 작은 방 >

             < 11:01, 명륜당 영역 내 존경각(尊經閣) >

  2004년부터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강제 퇴거한 상태로 지금은 비어 있다. 열어 놓고 개방한 창문 안으로 들여다 본 작은 온돌방에서 옛 유생들이 생활하던 모습을 그려 보기도 한다. 1519(중종 14)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윤탁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앞마당의 은행나무 아래에서 잠깐 휴식(10:45~11:00)한. 명륜당 영역 위쪽에 있는 존경각은 우리나라 대학 도서관의 효시로 성종 6(1475) 한명회의 건의로 명륜당 북쪽에 건립하여 사서오경과 제자백가 등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 11:02, 명륜당 영역 내 육일각(六一閣) >

              < 11:03, 명륜당 영역 내 진사식당(進士食堂) >

             < 11:05, 명륜당 영역 내 정록청(正錄廳) >

  육일각은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는 활과 화살 등을 보관했다. 선비들의 기본 소양인 예(),(),(),(),(),()인 육예(六藝)중 활쏘기()는 선비들의 기본 소양으로 익혔다. 동서재에 기숙하는 유생들의 전용식당으로 태조7(1398) 33칸 규모로 지어졌다. 북을 쳐서 식사시간을 알리면 유생들이 의관을 갖추고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식사했다. 정록청은 태조 7(1398) 성균관 관리의 관직인 학정(學正)과 학록(學錄)에서 딴 이름으로 관인들의 사무실이다.

                < 11:09, 명륜당 영역 내 향관청(享官廳) >

                   < 11:15, 유림회관(儒林會館) >

             < 11:25, 원점회귀 4호선 혜화역 4번 출입구 >

  향관청은 제관들이 재계(齋戒)하고 향과 축문을 보관하던 곳으로 성현(成俔)의 건의로 성종 4(1473) 명륜당 북동쪽에 10칸 규모로 건립되었다. 처음 성균관 입장할 때, 옆에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유림회관으로 들어가 냉방시설에 더위를 식힌다. 처음으로 성균관을 찾아서 제사를 지내는 문묘,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을 돌아보는 유익한 짧은 시간(1시간30)이었다. 예상외로 일찍 끝나, 다음 21번째 코스인 남산골 한옥마을로 간다. 혜화역으로 원점 회귀하여, 충무로역으로 간다.

 

                                        ‘16. 7. 30() 성균관(문묘)을 다녀와서...

    

Posted by 프코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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